[책] 불멸의 유전자 / 리처드 도킨스

저자는 생태계를 거시적으로 조망하며 모든 생명체, 특히 인간은 그저 유전자 증식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해석한다. 단순한 생물학을 초월하여 너무 큰 그림을 보는 책이다 보니 어쩌면 인간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처럼 허무하게 들릴 수 있으나, 이를 탐구하고 깨우칠 수 있는 존재마저도 인간뿐이라는 역설적인 위대함 또한 내포한다고 생각한다.

 

책에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동물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다. 어릴 적 동물을 너무 좋아해서 재미도 없는 동물 백과사전을 몇 십 번이고 다시 읽던 기억이 떠올랐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동물들을 보면서 쟤네는 친척일까, 다른 애들인데 사는 동네가 비슷해서 닮은 걸까, 엄마는 같은데 아빠는 다른 걸까 알쏭달쏭했던 궁금증에 대해 진화생물학적 답변을 얻을 수 있어 새롭고 명쾌했다. 결국 유전자들은 성적 결합의 순간에 서로 이기적으로 협조하여 강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유전체계를 탄생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진화생태학적 근거가 인간을 포함한 동물은 유전자들이 살아남기 위한 연쇄 사슬적 도구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힘을 실어주고, 나 자신과 인류 전체의 존재가치를 재고하며 인간이라는 종의 의미를 겸손하게 바라보는 시각을 선물하는 것 같다.

 

피상적으로 우성이 우월한 유전자, 열성이 열등한 유전자라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과학적인 관점에서는 어떤 형질이 표현형(phenotype)으로 드러나는가에 따른 구분일 뿐이다. 유전자에서 우월과 열등을 따지는 건 사회적 가치 판단이 들어간 오류이고, 과학적으로는 어떠한 근거로 우성과 열성이 구분되는지에 대한 지표에 집중하고, 그저 발현여부에 초점을 맞출 뿐인 듯하다. 본문의 내용 중에서 아래 내용이 참 인상 깊었다.

 

115 | 동물은 '진화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데본기 화석인 틱타알릭은 어류와 육상 척추동물의 전이 형태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전이 형태라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다. 틱타알릭은 호흡하고 먹고 번식하면서 삶을 살아간 동물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동물에게 역공학을 전개할 때, 더 나은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는 중간 단계가 아니라, 그 자체로 봐야 한다.

 

틱타알릭이라는 멸종한 어류는 지금 시대에서나 학문적으로 '전이 형태'라는 평가절하된 명찰을 부여받지만, 그 당시에는 당당히 존재하던 하나의 생명체였다는 것이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살아남았다는 것이 가장 우월하다는 의미일 수 있으나, 순간을 포착하면 생명체 하나하나가 현생의 존재가치를 갖는다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메기 같기도 도롱뇽 같기도 하면서 짠하게 생긴 물고기가, 멸종했다니까 더 짠해 보이는데, 어찌 됐던 그 시기에는 틱타알릭이라는 당당한 명찰을 달고 살아 숨 쉬었다는 이야기겠다.

 

나는 내 마음에 여유가 사라질 때, 내가 아등바등 가여워 보일 때, 좌우명 같은 말을 되뇐다.

인생이라는 놀이공원에 자유이용권을 끊고 들어온 사람처럼 놀다 가자.

그저 유전자 증식을 위한 도구처럼 담담히,

이름 석자 명찰 붙이고 태어난 김에 당당히,

이번 생은 그렇게 놀다가야겠다고 다시 다독여 본다.